과니의 문학리뷰 & 창작 일지

무기력이 올 때면 (Feat. 시쓰기가 어려운 이유) 본문

일기

무기력이 올 때면 (Feat. 시쓰기가 어려운 이유)

과니(Gwany) 2021. 1. 6. 10:50

내 시 담당교수님이 말한 것들 중에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게 몇 가지 정도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시는 무언가 결핍되어있어야지 쓴다"라는 것이었다. 산에 올라가서 일출이 올라오는 풍경을 보고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시 하나 읊으라고 하는데, 이미 그 순간 그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멋지고 행복한데 굳이 시라는 것을 쓸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본인이 행복하고 만족스럽다면 글이라는 것은 나올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결국 '시'라는 것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결핍에 대해서 쓰게 되는 것인데,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창비 등의 시를 보고 있으면 슬픔이 많다. 깨달음의 시도 있긴 하다만, 본인이 행복해서 썼다고 볼만한 글은 없다. 그러면 이때즈음에 교수님의 또 한가지 생각나는 말이 있는데, "슬픔에 대해서 쓴다고 치자면, 뭐에 대해서 슬픈지 적어도 스스로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걸 쓰지 못하는 이상 본인도 본인의 슬픔이 뭔지를 모르면서 무작정 쓰게 되는 꼴이기에, 가만히 시를 읽다보면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었다.

 


(안좋은 시의 예)

 

"나는 한없는 슬픔에 잠깁니다."

[그래서?]

"젖은 휴지를 앞뜰에 널어놓고, 아흐레를 다시 흐느꼈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노을진 물결을 바라보자 한강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게 뭔데?]

"에이는 가슴을 안고 돌아선뒤 땅에서 미련을 뜯어냈습니다."

[아니 그게 뭐냐고 그러니까.]


 

 

교수님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런 덕분에 '시=있어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본인이 글 좀 쓴다고 자부하는 애들을 멘붕시키는데 굉장히 정통하셨다.

 

학생 : "슬픔에 대해서 썼습니다."

 

교수님 : "뭐가 슬픈데?"

 

학생 : "예? 어.. 세상이 슬퍼서요."

 

교수님 : "세상이 왜 슬픈데?"

 

학생 : "에? (찐당황) 그, 각박한 세상에 소외된 기분이 들어서요?(이쯤부터 본인도 본인이 무슨소릴 하는지 모른다)

 

교수님 : "그래? 세상이 왜 각박한데?"

 

학생 : "8ㅁ8흐엉"

 

이러한 날카로운 지적을 하고 났을 때 깨달은 학생들이면 시 쓰는 실력이 상당히 올라간다. 혹은 또 다른 방법으로 시창작 실력이 향상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예를 들어 오래전부터 이미 많은 슬픔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마음속에서 거르고 거른 슬픔의 결정들을 알아서 쓰는데에 특화되어있었고, 혹은 진짜 좋아서 연애했다가 헤어져버린 사람도 그랬다. 사흘 밤낮을 울 순 없어서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더니 알아서 시창작 실력이 늘더라.

 

이즈음 되면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시를 쓴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작업이 된다. 내가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던 나의 결핍들을 전부 다 벌거벗겨서 마주보고 있어야지 문장 하나가 더 나올 수 있어서다. 흔히들 문학소녀, 문학소년 하면서 예민한 감성과 섬세한 마음 어쩌고 하는데, 그것만큼 불편한 게 없다. 세상 좀 단순하게 살고싶은데 내가 나란 사람의 결핍을 너무 잘 알아서 괴로운 일이 벌어지니까.

 

 

 

최근들어서 무기력이 다시 시작되었다. 동기부여 동영상이나 트라우마나 사고, 장애 등으로 인해서 힘든 시기를 겪다가 극복한 사람들의 근황을 보면서 조금씩 더 움직여보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즈음 되면 할 수 있는게 거의 없어진다. 약만 안먹었지 우울증도 세게 겪어보고, 스트레스로 머리도 한움큼씩 빠져보고, 몇 달간 잠-식사-잠-식사의 폐인루트를 타본적도 있다보니 나는 이제 나의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거지같은지 스스로 잘 판단이 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안 먹다가 갑자기 먹는거보니 약간의 폭식/거식이 일어나는 것 같네. 스트레스가 좀 많이 쌓였나봐. 이 와중에 몸이 적응을 못하는데 간이 제일 고생하는 느낌이네. 수시로 피곤해. 짐작하긴 했지만 몇개 영상을 보고 나니 지금 내 상태가 번아웃에 가장 가깝다는 걸 알겠어. 정신병이라거나 성격장애라고 하기는 뭐하고, 딱 그 DANGER 경계선이 쳐저있는 곳에서 불안한 외줄타기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어떡하지. 최근 들어서 불안함이 다시 좀 세지고 있어. 아마 카드값이랑, 내 줄어든 월급이랑, 당장 구할 수 없는 추가 일자리랑, 성과를 잘 내지 못하고 있는 내게 스스로 화가 나서 이런 게 또 생겨버린 것 같은데. 악순환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은데. 아, 어쩌지. 나는 나를 사랑하는게 가장 힘든 사람인데. 이걸 또 어떻게 고쳐야 하지.'


 

일단은 어떻게든 벗어나야지 싶어서 무작정 패딩을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새벽 두시에 나간 공원은 사람이 없어서 음식 먹기 좋더라. 한시간을 정자에서 뒹굴거리다가,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근처에 있는 운동기구를 또 막 하다가, 음악을 듣다가 돌아왔다. 아주 잠시간의 휴식이지만 상당히 개운해진 느낌이 들어서, 돌아오자마자 지치지 않고 운동을 할 수 있었다.

 

10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고등학생때 MBTI를 검사하자 나는 '잘 먹고 잘 자고 생각이 단순하다'라는 진단을 받았다. 별로 주변의 반응에 대해서 그리 예민하게 받아들이지도 않고, 내가 내 스스로에 대해서도 막 엄청 심각하게 고민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에 반해 누나는 굉장한 새가슴이였고, 작은 일에도 우는 일이 종종 있었던 사람이었는데,

 

내가 문창과를 들어가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대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굉장히 감정에 예민한 사람이 되었고 상대방이 꺼내는 단어들 하나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된 반면, 누나는 대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할 말은 다 하고 살고 되려 털털해지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가끔씩 내가 문창과를 들어오게 된 것을 후회할 때가 이때즈음이다. 나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 내 스스로가 너무 잘 이해해버리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또 화를 내고 슬퍼질 때. 남에게 내는 화는 (좋다곤 못하지만) 해소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스스로에게 내는 화는 결국 스스로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어서.

 

당장 나와 누군갈 사랑하기에도 바쁜 세상인데 힘들다.

 

다시 힘내봐야지.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