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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니의 문학리뷰 & 창작 일지
101동 경비원이 일을 그만뒀다. 이렇다 할 이유는 없었다 한다. 극성맞은 주민에게 호들갑에 가까운 핀잔을 맞은 것도 아니었고, 부녀회와 마찰도, 처우의 문제도 아닌 듯했다. 어머니는 쭈그려 앉은 채로 빨래를 밀며 그 소식을 알려주고서는 갈 때가 되어서 갔나보지 라고 말했다. 생각보다 냉담한 반응이었기에 물을 마시다 말고 입을 뗐다. 내가 읽지 못한 경비원의 얼굴을 당신이 읽은 건지도 몰랐다. 사회복지기관에서 일하다 보면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의 표정이 어떤지 알게 된다. 나 같은 경우에는 기초수급자와 독거노인을 겸한 쪽이었는데, 대부분 깊지는 않아도 선명한 눈그늘과 만성적인 피로 덕분에 다소 날이 서 있는 어투를 가진다. 본인의 성향에 따라 정도는 달라져도 본인의 외로움을 딱히 해소할 만한 관계나 대상이..
음식점이 바빠지는 달은 정해져 있다. 기념일이 많이 끼어있는 5월이나 휴가철을 제외한 여름, 크리스마스를 포함한 연말이다. 이쯤 되면 주말에 들어오는 손님의 수가 부쩍 늘었다. 그리고 그에 덩달아서 음식점 사장과 아르바이트생들의 손놀림도 분주해졌다. 전화가 온 건 그 때문이었다. 크리스마스까지만 도와달라던 매니저는 30일과 31일까지 좀 도와달라고, 안 그러면 두 명이서 홀과 주방을 전부 봐야 한다는 사정까지 곁들이며 부탁했다. 저녁 6시 즈음부터 나온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1월 1일은 새해라고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지만 몇 년을 알바로 뛰어보자 도리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없을까. 단순히 다이어트 때문에? 으레 말하는 불금과 불토, 그리고 늘어지는 일요일을 겪고 난 뒤 다시 시작되는 월요일..
눈만 감아도 캄캄해져 버리는 세상이야. 직시만으로 얻을 수 있는 세상이라면, 또 얻지 못할 이유도 없겠지. 이미 우린 두 세계에서 살고 있잖아. 남자는 망가진 샤프를 누를 때마다 자기도 덩달아 깜빡거리는 듯했다. 제도 샤프는 조금만 세게 힘을 줘도 출구가 휘어져버려 심이 제대로 나오지를 못했다. 시간은 밤 열한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몸을 부스스 떨었다. 시월의 밤은 추워서, 남자는 예정보다 일찍 자기로 했다. 옆에 있던 작은 쓰레기통에 샤프를 넣어버리고선 고개를 돌렸다. 책상 옆 침대에는 서현이 남자의 이불을 턱 아래까지 끌어당긴 채로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너 가야지. 몇시야? 서현은 손목에 차있던 시계를 보고선 매트리스의 반동을 이용해 상체를 일으켰다. 놀란 이불의 허리가 꺾여 뒤로 접혔다. 서현이 ..
“엘리제님.”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누군가의 마지막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기에, 나는 이번이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 될 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태양을 등지고 나를 보고 있는 엘리제의 얼굴은 베일로 가려져있었다. 어떤 표정으로 날 보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일종의 무신경함은 아닐까 했다. 맑은 날이었다. 구름은 하늘에서 거칠게 흩뿌려졌다. 순간이 온몸으로 각인된다는 건 따끔거리는 느낌이었다. 좋고 나쁘고는 없었다. “네. 말씀하세요.” 엘리제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대답했다. 불러세운 건 내가 맞았지만 딱히 꺼낼 말 같은 건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딱히 중요할 사람은 아니었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해야했다. 5년만의 재회였다. 서로 보고 간단히 안부를 건네는 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