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니의 문학리뷰 & 창작 일지
모두 읽어야 완성되는, 서효인 시집 [여수] 본문
(개인적으로 시식, 혹은 시음식이라고 부른다.
시인이 이 시에서(혹은 이 시집에서) 어떠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지 기록하기 위한 카테고리
대부분 '문학동네', '문학과지성', '창비' 시집임을 밝힌다.)
'독서는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고, 생각보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남기고, 새로운 것도 도전해보기도 하는 음식은 독서에도 적용될 수 있어서다. 좋아하는 책을 찾고, 읽고, 생각보다 자기와 맞지 않는다 싶으면 중간에 읽는 것을 그만두고, 새로운 작가나 다른 카테고리의 책도 찾아보고. 책은 부담이 없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자녀들에게 독서교육을 시킨다면 "책을 읽어라", "끝까지 읽어라"라고 말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게 뭔지 물어보고, 그에 관련된 책을 선물해준다음, '읽고 싶으면 읽고 아니다 싶으면 말고'라고 얘기하는 게 좋을 것이라 보는 편이다.)
책이 '어떤 책인가'에 따라서 이 음식과 같은 행위에 더 닮아질 수 있는데, 나는 그 중 시집이 이에 속한다고 보는 편이다. 소설책은 읽다 말면 간혹 생각나고, 경제경영은 읽다 말면 덜 배운 느낌이 나는데, 시집은 시인을 이루는 생의 여러 조각들을 모아놓은 편집본이기 때문이다.
다만, 유일하게 끝까지 다 읽어보길 권하는 시집이 있다. 서효인의 [여수]다. 그림이 들어가는 시, 기호가 들어가는 시, 제목만 있고 내용은 없는 시 등, 온갖 종류의 독특한 시들은 본 적이 많지만 '시집' 자체가 독특한 개성을 갖는다는 것은 이런게 아닐까 해서다. 그의 시집의 거의 모든 목차는 지역명이다. 마치 시외버스를 타거나 새벽바람부터 고속버스를 타면 정류장으로서 만날 것만 같은 이름들이 그의 시집을 구성한다. "이 중에 네가 아는 곳 하나쯤은 있겠지"라는 듯한 우스갯소리마저 연상되는데, 단순히 개성적인 시라고 소개하기엔 송구할 정도로 좋은 시들이 많다.
그의 시는 감각적이다. 제목에서는 지역명을 말하지만 해당 페이지를 피면 후각까지 자극시키는 일이 잦다. 그의 시는 서사적이다. 시문학에서의 서사성을 꺼름칙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만, 그의 시들은 그 지역에서 살았던 누군가의 일대기 같은 측면을 가진다. 산문시를 빙자한 감각적 소설 같기도 하여,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면 시인이 아닌 소설가들을 떠올린다. 옛 작가들을 말하라면 현진건, 김승옥이 될테고, 현 작가들을 말하라면 하성란이나 김애란이다. 읽는데에는 순서가 없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기껏 집이 이사해봤자 경기도 구리였기에 '서울'부터 읽었다. 서울을 두고 '다리를 저는 도시'라 말하는 시인은 처음이었다.
시에선 낮인지 밤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것들이 더 많지만, 내가 볼때 그의 시는 밤이다. 그리고 바닷가, 아니면 안개비가 내리는 도심의 한 귀퉁이다. 물이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그의 시에서 비린내가 나는 것만 같아서고, 밤은 시적 화자들이 소주 한잔 대신 마시는 사연의 시간이라서다. 화자들은 서성이고, 배회하고, 쭈볏거리다가 가만히 앉아있다. 혹은 어딘가 불편하거나, 멍하니 있거나, 아니면 바쁘게 움직이지만 머릿속이 백색 소음과도 비슷하다. 그것은 불가피한 체념이거나, 만성화된 불안과 닮아있다. 간헐적인 냉소가 시의 곳곳에서 보이는데, 이게 썩 비루하다가도 영화속의 한 장면처럼 처연하다. 지나칠 법도 한 이 모든 독립된 불안의 컷들을 어떻게 다 모았는지 신비할 정도다.
'난 이 지역을 모르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굳이 구애받지 않는다. 지역의 특색을 모른다고 해서 이해 못할 시가 아니다. 또한 되려 지역마다 일정한 선입견이나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추상적 관념이 있다면 되려 그게 시를 읽는데 방해를 할 지 모른다. 심지어 화자들이 꺼내는 시간은 차이가 들쭉날쭉하다. 시집을 꺼내든 사람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에 따라서, 아마 와닿는 지점들이 전부 다를 것이다.
조교를 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시를 쓰거나 읽기 시작했는데, 그 전까지만 해도 소설로 졸업을 했었다보니 내 시에는 산문적인 성향과 서사성이 비집고 들어오려는 경향이 없잖아 있었다. 시를 쓰다가 한창 어딘가에 막혀서 끙끙거리고 있을 시기에 교수님이 추천해준 시집이 이 서효원의 [여수]였다. 난해하지도 않고, 각 지역마다의 시가 존재하고, 거기다 서사성도 있고, 화자의 캐릭터가 분명하다. 아마 시를 읽기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나처럼 쉬이 읽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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