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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의 연필깎이 - 시집 [중국인 맹인 안마사] 본문

문학리뷰/시집 리뷰「시음식(詩吟式)」

심재휘의 연필깎이 - 시집 [중국인 맹인 안마사]

과니(Gwany) 2020. 12. 10. 19:25

사춘기는 수식어가 없는 밤이다
열여섯을 앓고 있는 딸이 눈물방울을 떨구고

 

첫 문장부터 강렬한 메시지가 날아와 꽂힌다. 딸은 열여섯이라는 사춘기를 '앓고'있다. 그리고 딸의 아빠인 화자는 그런 상황에 살짝 난처함을 가지고 있다. 화자에게 '사춘기'라는 건 너무나 오래전에 겪어 쉬이 짐작할 수 없는 시기다. 그 와중에 딸이 울고 있기에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은 남는다. 이러한 상황이 시로 승화된것이 심재휘 시인의 <샤파 연필깎이>다.

 

아직은 식지 않은 여름밤에
선풍기는 소리 없이 돌고
나는 연필깎이로 샤파 샤파 연필을 깎는다

 

심재휘의 시는 쉽고 구체적이다. 사춘기에 대한 낯선 표현과 울고 있는 딸의 모습 아래로 지금이 어떤 계절이고 화자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아직 열대야가 다 가시지 않은 여름밤에, 더운 바람을 뿜어내면서 돌고 있는 선풍기를 뒤로 하고 화자는 연필을 깎고 있다. 장면은 어렵지도 않고, 낯설지도 않으며, 내레이션이 나오는 단편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이 난다.

 

(중략)
셀 수 없는 몇 자루의 밤을 몸 안에 품고 오늘은 딸이 운다
그럴 때면 나는 뭉툭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연필을 연필깎이에 넣고
길고 까만 심이 나오도록 손잡이를 돌리는데
살살 돌리는 방법밖에 알지 못하는 나의 손에는
얇고 구불구불한 눈물의 밥만 가득한데
연필의 내심이 제법 뾰족해져도 나에게는
열여섯 사춘기를 베껴 쓸 수 있는 연필이 끝내 없다

 

딸의 마음은 몇 자루의 밤과 같고, 화자는 '아빠'가 처음이라 딸의 맘을 온전히 이해해주지 못한다. 그는 딸에게 윽박지를 생각도 없고, 자기의 생각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애꿎은 연필만 묵묵히 깎고 있음에도 화자에겐 열여섯 딸의 마음을 헤아릴만한 무언가가 나오지 않는다.

 

서글픈 딸의 봄밤은 작고 가지런한 그녀의 발등 위로
수식어도 없이 한 방울씩
툭툭 떨어져 번지고 있다

 

시는 이 연을 마지막으로 마무리된다. 화자는 딸이 우는 모습을 다시 보고,'서글픈 딸의 봄밤'이 '툭툭 떨어져 번지고 있다'며 미안해한다.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지만, 상처를 준 것만 같아 당황스럽고 미안한 화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화자와 딸은 화해했을까. 화해라고 하기는 뭐할지도 모른다. 가끔씩 '시간'이라는건 넘겨짚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벽으로 변해, 부딪치기만 하고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장애물이 되니까. 하지만 나는 화자가 시간이 늦더라도 딸의 사춘기를 이해할 수 있는 연필을 가질거라고 확신하며, 딸 또한 빠르던 늦던 화자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의 시집 [중국인 맹인 안마사]가, 누군가에 대한 끝없는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에.

 

심재휘 시인의 시들은 대부분 시인이 겪었던 경험들을 기반해 쓰여졌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대부분 '나와 떨어진 누군가에 대해 생각함'으로 공통점을 갖는다. '누군가'는 집을 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기도 하고, 자신의 아버지이기도 하며, 혹은 우주 너머로 사라진 보이저 1호이기도, 자기 자신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달'과도 닮아, 밤이 찾아오면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서도 쉬이 가닿을수는 없는 존재가 된다. 떠나간 것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빛은 따뜻하다.

 

잔잔한 그리움과 더불어 읽는데 부담감이 없는 시를 읽고 싶다면 [중국인 맹인 안마사]를 추천하겠다. 비가 올 때 읽으면 기가 막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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