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니의 문학리뷰 & 창작 일지
카르마를 곁에 둔 심보선 -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 본문
(개인적으로 시식, 혹은 시음식이라고 부른다.
시인이 이 시에서(혹은 이 시집에서) 어떠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지 기록하기 위한 카테고리
대부분 '문학동네', '문학과지성', '창비' 시집임을 밝힌다.)
아주 예전, 초등학교 5학년 적인가. 아버지는 집에 어린이도 읽을 만한 불교 만화책들을 가져와서는 집에다가 꽂아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탁월한 계획이다. 글 책에 아무런 관심이 없던 나는 그걸 냅다 집어서 읽고는 했으니까. 불교 책이다보니 스님들이 자주 나왔고, 혹은 스님들과 같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제는 읽은지 15년도 더 된 기억이기에, 책 내용은 듬성등성 기억날 뿐이다.
심보선의 [오늘은 잘 모르겠어]라는 시집은 종교적인 단어가 쓰인다. 성서와 비슷한 어조가 나오기도 하고, '증오'와 '천국', '은총'을 말하기도 하고, '형은 어쩌면 신부님이 됐을거야.'라며 시작하는 시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시집을 읽을 때 내가 읽었던 그 만화책을 기억해낸다. 혹은 '모든 것이 나의 업이로다'라면서, 천천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스님을 떠올릴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집이 불교적인가 싶으면 그 또한 아니다. 이 시집은 묘하다. 종교적인 단어는 들어가있으나 종교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극적인 말투, 혹은 누군가에게 넌지시 편지를 보내는 듯한 그 분위기가 되려 지극히 속세적이다. 신적 존재를 향해 찬양하는 느낌도 없고, 그렇다고 혼자 수행하는 느낌도 없다. 그는 적당히 삐뚤어졌고, 적당히 정이 많고, 적당히 무던하다. 그리고 그 모든 적당함에 과한 힘이 들어가있지 않다. 이유는 아마, 그가 말하는 '카르마' 때문일 것이다.
카르마(Karma). 산스크리트어로, 미래에 선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던 인간의 모든 소행이다. 꺼낸 말이나 행동하는 몸, 혹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상태가 모두 미래에 벌어질 일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을것이라 말하는 일종의 운명. '선악'은 '천국과 지옥'으로, 혹은 '극락과 나락'으로 불린다. '극락과 나락'을 보면 알겠지만, 카르마는 불교에서는 '업(業)'으로 불린다.
인간은 보통 본인의 업보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경우가 많다. 종교를 막론하고 전승되어오는 여러가지 이야기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죄를 짓고 나서 그 죄를 씻기위해 참회하는 자와, 남에게 자신의 것을 베풀고 훗날 그에 대한 보답을 맏는자. 굳이 옛날 이야기를 뒤지지 않아도 월트 디즈니의 스토리는 악역이 나중에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고, 주인공들은 '사랑'을 깨달으면서 성장한다.
다섯살 즈음인가, 엄마한테 대롱사탕을 사달라고 그렇게 졸라댔는데 엄마가 경찰차의 점멸등을 보고선 "경찰아저씨 여기 나쁜애가 있으니 잡아가세요!"라고 외쳤다. 그리고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지. 그 빨갛고 파랗게 번쩍거리는 등이 나를 잡아가버릴까봐 합죽이처럼 있었다. 생각해보면 아주 어릴 적부터, 사람은 본인이 나쁜짓을 하는건지 아닌지에 대해 스스로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것 같다. (엄마 미안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의 난 짐승새끼였어)
불변하는 믿음을 가졌으니 나는 천국에 갈거라고 믿는 사람들과, 다음 생에 잘 살기 위해서라도 나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들은 지금도 많다. 강남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는걸.
그런데 이 시집에서 심보선은 그런 강박이 없다. 그에게 '카르마'란 본인이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쌓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혹은 본인 자체이기도 하고, 본인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다른 누군가다. 자기가 애쓴다고 해서 잘 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듯이. 혹은 이미 지금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카르마)만으로 생이 충분하다는 듯이. 그래서 나는 그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초연해서 놀랄 때가 가끔 있다. 무감정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감정의 기분이 극심하지도 않는, 간조때의 바다같아서.
어릴적 읽었던 그 책에서 하나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제국의 황제가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학자에게 연구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10권을 만들어내자 '내 눈이 침침하여 1권으로 줄여달라' 했고, 1권으로 줄여오자 '내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한마디로 말해달라'고 했다. 학자는 숨을 가쁘게 쉬고 있는 황제의 앞에서 고심하다가, "폐하. 인생이란 태어나서 살다가 늙어 죽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심보선은 굳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서도, 이 비거대한 진실을 몸으로 깨달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어쩌면 내가 불교에 가까운 아버지의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를 스님과 비슷하다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간 본 그는 산다는 것이 모두 본인의 카르마고, 감정을 다스리는 수행이 시를 쓰는 행위와 비슷해보였다. 내 주변의 후배들과 함께 심보선 좋다고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지금 다시 보아도 역시 띵작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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