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니의 문학리뷰 & 창작 일지
당신의 새해, 그리고 오은의 달력 - 시 「1년」 본문
(개인적으로 시식, 혹은 시음식이라고 부른다.
시인이 이 시에서(혹은 이 시집에서) 어떠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지 기록하기 위한 카테고리
대부분 '문학동네', '문학과지성', '창비' 시집임을 밝힌다.)
12월과 1월은 온도차가 다르다. 작년 12월이 따뜻하고 올해의 1월이 춥다는 진부한 사실 따위가 아니라, 새순도 돋지 못한 채 죄다 떨어져 나가는 계절에서 어찌어찌 살아보려는 사람들의 '욕망의 온도차'를 말하는 것이다.
20의 숫자가 21로 바뀌면(십의 자리 숫자가 벌써 2라니,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일까) 가장먼저 달력들이 교체된다. 기업체의 새해 목표가 바뀌고, 학교의 입학팀은 막바지 수시와 신입생 맞이로 바쁘다. 아카데미나 교육원들은 상반기 커리큘럼을 짜서 내놓는다. 그리고 커다란 것들이 바뀌는 와중에 가장 큰 변화의 주인공이 있다. 개인이다.
'10kg 감량'같은 거창한 목표에서부터, '올해는 조금만 더 행복해지기' 같은 소박한 것들까지. 분명 날씨는 풀리지 않았는데 해가 바뀌었단 이유만으로.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나쁠 것은 없지 않냐는 말과 함께 바삐 움직인다.
그리고 한 4월 달즈음이 되면, 그 모든 계획은 죽어있던가.
학교를 졸업한 20대. 일상이 고되다는 것은 깨달아서 딱히 슬프지 않았지만, 집으로 돌아왔을 때 본 자신의 모습은 내가 바라던 모습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있던 적이 잦았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도 아니고
스승도 아닌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줄 수 있습니까
오은 - '1년' 중
평론가 허윤진은 오은을 두고 "언어가 구성하는 사회적 조건과 가치를 의심하고 질문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을 조금만 단순하게 풀자면, 오은은 우리의 '1년'을 두고 다시 묻는 것이다. 나의 1년. 당신의 1년. 우리의 1년은 그렇게 커다란가. 원대하고 거창할 것 같은 시작임에도 끝이 보잘것 없진 않은가. 설레게 시작하고 바쁘게 살았다가 자조적으로 끝나는 1년을 작년에도 겪었으면서 올해의 '1년'이 그때와는 다를 것이라고 다짐하는 개인이란. 우린 스스로의 존재론적인 의문과 '1년'의 가치를 조금은 오역하고 있지 않은가.
오은은 누가 들으면 조금 불편해할만한, 누가 들으면 슬퍼할 만한 말을 담담하게 꺼낸다. 그의 말은 누구보다 우리와 가까우면서도 1년을 부정한다. 그리고 부정한다기보단 대충 좌절하고, 대충 좌절한다기보다는 언짢은 체념같으며, 언짢은 체념같다기보다는
관습적으로 고정되어버린 스스로를 바라보며 슬퍼하는 느낌도 든다.
다시 1월
올해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1년만큼 더 늙은 내가
또 한번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2월에 있을 다섯 번의 일요일을 생각하면
각하는 행복합니다
나는 감히 작년을 승화시켰습니다
오은 - '1년' 중
'문학리뷰 > 시집 리뷰「시음식(詩吟式)」'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백의 전후 -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3) | 2021.01.07 |
---|---|
김언의 혼백 - 시「유령산책」 (3) | 2020.12.29 |
모두 읽어야 완성되는, 서효인 시집 [여수] (5) | 2020.12.21 |
카르마를 곁에 둔 심보선 -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 (1) | 2020.12.17 |
심재휘의 연필깎이 - 시집 [중국인 맹인 안마사] (1) | 2020.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