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니의 문학리뷰 & 창작 일지
공백의 전후 -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본문
시작하기에 앞서, 공백의 정의부터 알고 가자.
1-종이나 책 따위에서 글씨나 그림이 없는 빈 곳.
2-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음.
3-특정한 활동이나 업적이 없이 비어 있음.
네이버에서 사전적 정의를 찾으면서 나는 상당히 흥미로움을 느꼈는데,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음'이라는 중립적인 두 번째 뜻풀이의 앞뒤로 긍정과 부정이 따라오는 듯해서였다. 종이나 책 따위에서 글씨나 그림이 없는 빈 곳은 어떠한 부정적인 느낌도 들지 않는다. 작은 메모를 할 수 있는 빈 공간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음으로써 '여백의 미(美)'를 더하는 가치 충만한 공간의 공백이다. 이에 반해 특정한 활동이나 업적이 없이 비어 있음은 왠지 모르게 쓸쓸한 공백이다. 가수들의 기나긴 공백 기간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떠한 존재에게 이렇다 할 성과를 매길 수 없는 것만 같은, 존재로서의 부정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도 이러한 공백을 맞이하는데, 기본적으로는 '내가 나를 생각하지 않는 순간'을 떠올리면 편하다. 편안함과 만족감으로 인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을 때 나는 나를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들고, 혹은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걱정하면서 현재의 나를 보지 못했을 때도 현재의 나를 내팽개치고 다른 곳에 가있다. 한강 시인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을 읽으면서 나는 계속 그녀가 자신이 느꼈던 공백에 대해서 말하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부사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멈칫'과 함께 그녀의 모든 행동에 딜레이가 걸리는 느낌이랄까. 시의 처음부터 그녀의 동작이 멈췄음을 알 수 있었다.
밥을 먹으려던 화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이 지금도 생기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 사람의 정적이다. 떠나간 것들에 대한 사유(思惟)는 다른 시에서도 자주 나오는 것들이나, 시적 화자의 동작이 일시정지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한강의 시집에서 두드러지게 관찰 가능하다.
위 시가 가장 빠르게 읽혔는데, 아무래도 그녀의 어떤 내면 감정이라기보다는 그녀가 막연하게 상상하는 장면들을, 나도 막연하게 상상하면서 넘어갈 수 있어서였을 것이다. 시에서 '마크 로스코'는 화자와 같은 연대에 살던 존재도 아니고, 서로 접점이라고는 없으며, 하물며 화자의 전생 같은 그런 초월적인 것 또한 아니다. 그저 마크 로스코라는 사람이 죽고 나서 자신이 태어나기 사이까지의 9개월여의 시간을 지레짐작하는 것일 뿐이다.
그녀는 이러한 시간에 대해서 '신기한 일이 아니라/쓸쓸한 일'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녀가 면식도 없는 사람에 대해서 과몰입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쓸쓸한 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먼 곳에서 본 적 없는 남자가 자신의 손목을 긋고 죽어가고, 그 즈음에 한 남녀는 몸을 섞고 화자를 갖는다. 남자의 손이 다 썩기 전까지의 9개월의 시간. 화자가 태어나기까지의 9개월의 시간. 그 '상관없음'이 만들어내는 9개월보다 차가운 괴리감(공백)이 시를 한겨울로 만들어버린다.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녀가 겪었던 부정의 공백이 천천히 긍정의 공백으로 넘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건 우울증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던 어떤 사람같기도 하고, 기나긴 공백의 기간을 어떠한 성장의 계기로 삼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위의 사진은 시의 내용이 아닌 제목이다. 제곧내(제목이 곧 내용)라서 이걸 모자이크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심히 고민했다만, 제목은 괜찮겠지.
소금기 가득한 바람이 부는 2005년의 제주 봄바다에서 화자는 나머지 삶이 덤이라고 느꼈나 보다. 이 시는 1부의 마지막 시인데, 나는 부정적 공백으로 괴로워하던 시적 화자가 문득 자신의 현재를 보고 나서는 공백의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를 가지게 된 건지, 그래서 여기서부터 긍정적 공백으로 변하는 건지 생각해봐야 했다. 물론 2부는 해부 극장이어서 거의 모든 시에 선혈이 튀기지만, 3부부터 달라진다. (개인적으로 2부의 시들은 자기해체적인 느낌이어서 읽는데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괜찮아'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회복기의 노래」가 그녀의 긍정적 상태를 대변해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별빛이 내린다♩ 샤라랄라 라랄라~♬
시집의 처음에서 화자의 삶이란 '영원히 지나가버린 것들'이 모여진 어떤 확정된 운명'같은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이렇다 할 답이 없이 햇빛이 내린다. 그녀의 모든 감정이 긍정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너무나 눈부신 빛이 내려올 때, 우리는 그것을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리니까.
화자는 영원히 지나가버렸기에 다시 가지고와 고칠 수 없는 자신의 일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슬픔이 아직 다 지워지지 않은 게 3부의 시 곳곳에서 흔적처럼 보인다. 살아있는 한 결핍으로 인한 슬픔은 절대량을 유지하기에, 자신에게 유예된 슬픔이 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진행되면서, 그녀가 그런 자신까지 별 말없이 받아들이기로 한 게 보이는 느낌이었다.
2016년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하고 나서 한참 동안 한강의 붐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광화문의 매대에 채식주의자와 그녀의 시집이 가득가득했는데, 평소 가수 이적을 좋아하다 보니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라는 시집의 제목이 이적의 곡 '내 낡은 서랍속의 바다'가 연상되어서 질러버렸다. 실제로 펴서 읽은 것은 작년 즈음이었는데, 나는 차라리 게으르게 이 책을 펼친 게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2016년 때에는 내가 우울증을 한창 겪고 있을 즈음이어서, 아마 그녀가 말하는 빛들을 내가 이해 못하고 시집을 평가절하했을지 모르니까.
전공이 소설이었기에 그녀의 시집을 읽는데 많이 편안했던 것 같다. 5부즈음 가니까 소설가 한강의 표현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아서 또 새롭게 읽었다. 이제 쉰이 넘었을 그녀의 서랍에도 그때의 저녁은 고스란히 담겨있을까. 아마 좀 더 많은 바다가 담겨있거나, 아니면 좀 더 많은 서랍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은 날이 특히나 춥던데, 그녀의 공백이 따뜻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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